끝내 선내에 푸르고 따스한 빛이 감돌며 고대하던 이가 나타났다.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로 피범벅이 된 채로.
푸른 새가 홀연히 나타나 여러분이 기다리는 사람은 곧 돌아올 거라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떠났다. 동료들은 안도하며 서로 기쁨을 나누었지만⋯ 그들은 또다시 정적을 맞았다. 알리제가 먼저 엘린은 언제 돌아오냐며 불안 섞인 말을 꺼낸 것을 쌍둥이 남매와 어른들이 간단하게 다독여주었다. 하지만 모두 같은 생각을 하며 어서 엘린이 자신들에게로 돌아와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엘린이 선체 바닥에 머리를 부딪히기 직전 그를 받아낸 에스티니앙은 그 모습을 본 순간 애석하게도, 가장 원하지 않은 형태의 이별을 준비해야 하나 생각하고 말았다. (그 뒤나미스인지 뭔지가 듣기 전에 부정적인 생각들은 빠르게 삼켰다.) 세계를 넘나드는 것이 아닌 이상 아무리 멀리 떨어져도 느껴지던 용의 눈의 힘은 희미하기만 했다. 몸이 서서히 온기를 잃는 것을 모두에게 보고한 뒤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보고’라는 거창한 표현을 붙여도 되나 싶을 정도로 에스티니앙은 그저 읊조렸을 뿐이다. 영리한 동료들이 알아채 곧바로 치료에 이행했을 뿐.) 분주히 지시를 내리는 목소리와 어느새 바닥에 놓인 들것에 그를 조심히 눕힌 것까지는 어렴풋이 머릿속에 있었다. 그저 손 놓고 치유마법을 퍼붓는 광경을 바라만 본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렇게나 신경을 곤두세운 적은 무척 오랜만이란 기분이 들어 엘린에게 감돌던 눈의 기척이 조금씩 짙어지는 것을 모두에게 알리고 나서는 긴장이 턱, 하고 풀렸다. 그런 에스티니앙의 말에 한동안 분주했던 공간이 한순간 정적을 이루었다. 그리고 모두 짠듯이 혈색을 되찾아가는 엘린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
라그나로크에서 내린 엘린은 부축이 필요했어도 ‘스스로 걸어서’ 발데시온 분관까지 갔다. 에스티니앙은 이것도 그 뒤나미스 덕이었을까, 하고 막연히 생각했다. 여전히 그 힘이 유효하다면 다시는 파트너가 심하게 다치지 않길 바랐다. 수많은 전투를 겪은 이에게 이런 뜬구름 잡는 기도를 하는 자신에 헛웃음이 나오면서도 내심 자신이 이러는 이유를 모르진 않았다. 용기사단 동료들을 하나둘 보내던 시절과는 다르게 그때 왜 그렇게까지 초조함과 불안감을 느꼈고, 차도가 보이면 안도해 가슴을 쓸어내렸는지 확신했다. 하지만 지금은 엘린이 안정될 때까지 지켜보는 것이 먼저였다.
그 후 혈맹은 에스티니앙에게 휴게실에서 조용히 잠든 엘린을 간호하는 역할을 주었다. 선내에서 잠시 눈을 뜬 엘린과 몇 마디를 건넸던 것이 꿈이었나 싶을 정도로 그는 몇날 며칠을 내리 잠으로 보냈다. 평소대로 눈의 힘이 강렬히 맴돌고 있었기에 코 밑에 손가락을 대보거나 맥박을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에스티니앙도 그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주기적으로 이마나 뺨에 손을 대 체온을 확인해 보아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순전히 고집이었다. 파트너의 식어가는 체온과 흐려져만 가는 기척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오는 것을 막고 싶었다. 의뢰가 없는 날은 그렇게 하루를 보냈다.
오늘도 그렇게 마무리되려나 생각할 참에, 에스티니앙은 엘린의 귀가 순간순간 쫑긋거리는 것을 눈치챘다. 곧바로 자리를 잡고 앉아 엘린이 눈을 뜰 때까지 기다려보았다.
깜빡 잠에 든 것 같았다. 그런 것치고는 눈꺼풀이 무척 무거웠다. 눈앞에는 익숙한 천장이 자신을 반기고 있었다. 다행이다, 정말로 종말을 이기고 돌아왔구나. 엘린은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멍하니 생각했다. 갈가리 찢긴 줄 알았던 몸은 라그나로크에서 응급치료를 받았던 때보다 더 좋아졌는지 당시보단 가볍게 느껴졌다. 그런데 한쪽 손만은 무언가가 누르고 있는지 조금 무거웠다. 그리고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내 것이 아닌 숨소리가⋯.’
엘린은 얼른 뻑뻑한 눈을 굴려 상황을 파악했다. 손이 있을 곳을 내려다본 순간 헉, 하고 숨을 들이킬 뻔했다. 눈을 떴을 때부터 굳은살 같은 감촉이 느껴져서 설마, 정말로? 하고 어렴풋이 상상했었다. 머릿속의 바로 그 사람이 침대 옆에 의자를 두고 앉아 엎드려 있었다. 잠을 깨우면 실례일까 싶었지만 그렇게 불편하게 구겨져 있는 모습을 본 이상 더 망설이지 않았다.
제 손을 반복하며 약하게 맞잡는 힘에 선잠에서 깨어난 에스티니앙은 엘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 동시에 파트너가 얼마나 잠들어 있었는지 세어봤다. 오랜만에 잠에서 깬 이를 가만히 보고 있으니, 엘린은 아예 자신이 입을 열 차례라고 판단했는지 급하게 잠긴 목을 풀었다. 협탁에 놓인 물잔의 도움을 받고 기침을 몇 번 하고 나서야 간신히 입을 열 수 있었다.
“그, 편히 주무시는 게-”
“⋯너 일주일동안 잠만 잤어.”
그의 말에 놀란 동그란 눈이 더 커졌다. 에스티니앙은 아예 저보다 작은 손을 감싸쥐며 피식 웃었다.
“역시 몰랐나 보군.”
“마도선 안에서 잠깐 얘기하고, 분관까지 다같이 걸어갔던 건 기억나서 저는 눈만 붙인 줄 알고⋯.”
그럼⋯ 계속 이렇게 있어주신 건가요? 이번엔 에스티니앙의 말문이 막힐 차례다. ‘계속, 이렇게’의 기준은 무엇인가. 의뢰를 하러 나간 적은 있어도 바쁘지 않았고 간단한 일이었기에 금방 돌아올 수 있었다. 어쩔 때는 의뢰를 하러 나가 있을 때도 혹여 엘린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되던 때가 있었다. 여차하면 분관에서 지내는 그라하나 쿠루루가 그를 봐주겠지만 가능하면 빨리 돌아오고 싶었다. 혹시라도 엘린에게 무슨 문제가 생기면 자신이 가장 먼저 알고 싶었고, 자신이 그 자리에 있을 때 해결하고 싶었다.
“잘 잤으면 됐어. 그보다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엘린은 금방 귀에 힘을 주었다. ‘귀를 열고 듣다’라는 말이 이들을 보고 만든 것인지 싶을 정도로 비에라의 귀는 상대방에게 많은 것을 말해주었다.
“그때 왜 ‘고맙다’고 했었나?”
아-⋯. 엘린은 에스티니앙이 무얼 말하고 싶은지 바로 알아챈 듯 눈을 굴리며 작게 숨을 내뱉었다. 기억을 되돌려 엘린을 제외한 모든 동료들의 발이 땅에서 떨어지며 허공으로 떠오를 때. 엘린은 그들을 라그나로크로 보내는 동시에 미소를 머금고 무언가 발음했다. 모두 그가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내려 필사적으로 입모양을 읽었기에 마도선에선 ‘영웅의 한마디’에 대한 과열된 대화가 오갔다. 그래도 모두 엘린이 무사히 이곳에 올 것이라는 희망만은 굳건했다. 그에게는 언제나 결정적인 순간 행운이 뒤따랐기에⋯.
“한 번도 얼굴을 본 적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우주 저편으로 보내려 많은 노력을 해오셨잖아요. 새벽의 모두도 언제나 온 힘을 다해 지켜주시고⋯.”
단지 그 이유였어요. 마음이라는 거⋯, 전할 수 있을 때 전해야겠다.
엘린은 미간을 찌푸린 채 몸을 일으키려 했다. 아직은 그가 안정이 필요한 몸이라 판단한 에스티니앙이 도로 눕힐 찰나에 엘린이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여 그는 엘린의 등을 받쳐 돕는 김에 베개도 세워주었다. 침대 헤드에 기대 앉은 엘린은 막상 말하기를 고민하는지 우물쭈물거렸다. 에스티니앙은 어깨를 아프지 않게 제 나름대로 살살 두드려 재촉했다. 엘린은 그의 반응에 미소를 지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시선을 제 손께로 내린 채 속삭이듯 아주 작은 목소리로 꺼냈다.
“사실은 조금 서글펐어요. 지금에 오기까지 많은 이별도 있었으니까요. 언제나 큰일을 마치면 그 사람들과도 함께 축하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는데, 매번 그러지 못했던 것이 아쉽기도 했어요. 누군가의 목숨이 바쳐져야만 생겨나는 길을, 걷는 것이 정말 맞는 걸까 의심도 했어요.”
엘린의 고개는 점점 내려가고 있었다. 에스티니앙은 그가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기까지 거쳤을 마음의 준비나 결정 같은 것들을 생각해 손가락 몇 개로 턱을 괸 채 잠자코 들었다. 푹 숙인 고개가 꼭 자신에게 고해성사라고 하는 것처럼 보였기에 마음이 쓰여 미간을 조금 찌푸리긴 했지만.
“라자한에서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인연과 닿을 수 있었어요. ⋯하지만 종말의 야수로 변한 사람은 묻어줄 수도 없다는 말이, 무엇보다도 슬프게 느껴졌어요.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볼 수 없게 되는 건가⋯, 아히완, ⋯삼촌과도 아직 할 이야기가 많았는데⋯. 그런 생각만 하면서 무작정 허공에 손을 뻗었는데, 손끝이 무척 따끔거렸어요. 그때는 라하가 제 이름을 소리쳐 불러주어서 겨우 생각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고요.”
그리고 울티마 툴레에서 하나둘 길을 열어줄 때도 비슷한 생각이었어요. 다들 확신에 가득 찬 얼굴이셔서 계획이 어긋날 거란 생각은 없었지만⋯.
⋯.
한동안 조용하던 엘린은 이윽고 이불 위로 투둑, 하고 눈물을 떨궜다. 그 소리에 에스티니앙은 붙잡고 있던 손을 제 쪽으로 끌어와 힘을 줘 꼬옥 쥐었다. 퍼뜩 고개를 든 엘린이 붙들린 제 손을 한 번, 그리고 에스티니앙의 얼굴을 보았다. 샘이 터지기 시작한 눈에는 막힘없이 눈물이 여러 줄기로 흐르고 있었다.
“솔직히 외로웠어요. 마지막으로 알피노와 알리제가 만들어준 길을 저 혼자 걷는데, 어서 이 모든 걸 해결하고 모두와 다시 만나고 싶었어요. 투정부리고 싶어질 만큼 외로움이 커지기 전에요. 그런데 마음은 무거워지고, 다리도 꼭 땅에 붙은 듯 잘 안 움직여져서⋯.”
겨우 말을 잇던 엘린은 이제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기 시작했다. 에스티니앙은 급하게 근처에 있던 수건을 가져와 쥐여준 뒤, 밖에 나와 물잔을 다시 채워올 생각으로 일어섰다. 그런데 방금 들은 엘린의 외로웠다는 말이 묘하게 제 발목께를 맴도는 기분이 들었다. 몸은 호전되어도 지금까지의 일로 인해 마음이 쇠약해졌을 지금의 엘린을 잠깐이라도 혼자 두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떠나지 않고 손을 잡아주었다. 엘린은 그것을 힘껏 맞잡아 에스티니앙의 뜻을 받아주었다. 치료받는 사이 손톱이 제법 기른 건지 그의 굳은살 박힌 손바닥에 잔뜩 파고들었지만 오히려 그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다들 저를 믿어줘서 이런 결정을 해주었는데, 자꾸 부정적인 생각만 들면 혹시라도 열심히 싸우고 있는 동료들에게 상처라도 입힐까봐, 일부러 아무 생각도 안 하려고 앞만 보고 걸었어요. 모두와 함께 엘피스 꽃들을 볼 때만은 마음이 놓였지만, 어떤 마음이었는지 그 언덕 위까지 올라왔는지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모두에게 괜한 부담을 드리는 것 같아서 죄송했어요.”
엘린은 한 손에 수건을 꼭 쥔 채로 말을 이었다. 물기를 먹고 촉촉해진 그것은 엘린의 마음을 조금씩 가라앉히며 도움이 되었다. 반대쪽 손은 여전히 그가 붙잡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뒤나미스를 나눠주기라도 하는 듯이.
“그리고 에스티니앙에겐⋯ 고맙고 미안한 마음뿐이에요. 제가 깨어날 때까지도 지켜봐주시고, 지금도⋯ 성가셨을 텐데 제 말을 끊지 않고 다 들어주시고.”
“‘이런 얘기’하던 너는 처음 봐서. 그리고 한 번쯤은 내려놓아야 할 짐이었어. 지금이 제법 괜찮은 기회였는데 마침 내가 있던 거라고 생각해라.”
이 말을 전한 에스티니앙은 가슴 한구석에 자리한 양심이 '네가 우연히 엘린 앞에 있기를 의도한 것 아니냐'고 찔러대는 것을 무시했다.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며 마치 ‘지금 제가 불편하지는 않으세요⋯?’ 라고 묻는 듯한 눈동자를 본 에스티니앙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꼭 언젠가의 야영에서 제게 주눅들었던 앳된 모험가의 눈빛이었다고 순간 생각했다. 이젠 익숙해진 줄 알았는데.
“네 입으로 말했잖아. 무거웠다고. 이런 건 괜히 담아두면 널 짓누르고 말 거야.”
엘린은 잠시 생각하며 눈을 깜빡이다가 옅게 미소지었다.
“⋯고마워요.”
“뭘, 나야말로 너 아니었음 여기 있지도 못 했는데.”
에스티니앙은 피식 웃으며, 왜인지 아주 오랜만에 엘린의 웃는 얼굴을 보았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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