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2 최초작성

 

 

   이별은 예상치 못한 시간에 찾아와선 마음을 어지럽힌다. 새벽의 맹우들과 보낸 시간, 함께한 임무는 빠르게 입소문을 타 엘린을 빛의 전사라고 부를 만큼의 평판을 만들어냈었다. 다만 이를 좋게 보지 않는 부류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항시 떠올리며 살기엔 이 풋내기 모험가는 너무 바쁘고 어렸다. 소란 속에서 하나둘 흩어져 발소리가 줄어들고, 이별 안부를 전하는 동료들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이윽고 엘린만이 남아 모래땅을 밟았을 때는 요란한 바람 소리와 웅성거리는 목소리들이 합쳐져 머릿속을 울렸다. 물론 새벽을 믿어준 고마운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다(고 적어도 엘린은 그리 생각했다). 그 은혜를 돌려주고 싶지만, 당장의 이 터질 것 같이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고도 싶었다. 새하얀 로브는 이미 얼룩이 지고 물과 모래에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가만히 고개를 떨구고 시답잖은 잡생각을 할 때쯤 알피노를 만났다.

   “.”

   등불이 되어 제 모든 것을 불살라 에오르제아를 몇 번이나 위기에서 구했음에도, 자신은 동료들에게 희망을 찾아 기대있었다고 이번 기회에 여실히 느꼈다. 엘린은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에게도 신뢰의 손을 내밀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달리 고민할 건 없었다. 이는 동료로서 당연한 일이니까, 예상치 못한 상황 속에서도 새벽은 늘 함께 있다는 믿음을 본인의 존재로 보여주고 싶었다.

 

 

 

 

   모순적이게도 커르다스는 엘린에게 가장 따뜻한 곳이다. 그의 마음 한구석에 잠들어있는 어린 제 기억이 포근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여느 비나 비에라처럼물론 요즘 세상에는 지역의 다양성과 혼혈 등의 가능성이 풍부하지만, 이런 복잡한 사정들은 잠깐 제껴두자.눈 덮인 산에서 태어나 자랐겠거니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눈폭풍 불어닥치는 험준한 산맥을 이토록 안정적으로 오를 순 없었을 거라고 가설을 지어두었다. 그렇다곤 해도 흐릿한 고향의 존재는 엘린에게 절대적인 안정이 될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엘린은 매일 커르다스를 찾았다. 매일 해가 고개를 넘어가기 직전 용머리 전진기지의 문을 열어 자신이 또 하루를 살아냈음을 증명해 보였다. 그것을 허락해준 누군가가 있었으니.

 

   문을 열자 보이는 친우를 마주하자마자 엘린은 그 자리에서 혹여 주저앉아 있지는 않은지 눈짓으로 살폈다. 이 간단한 것도 직접 봐서 확인해야 했을 정도로 내몰린 상태였다. 그 푸르게 빛나는 눈동자가 자신을 포함한 동료들의 결백을 굳게 믿고 있음이 드러남에 미소를 지으며 심히 안도했다.

 

   “벗이여, 오늘은 푹 쉬도록 하게나. 수고 많으셨습니다. 여기까지 방문하는 것도 힘이 들었을 겁니다.”

 

   손님들이 안도감에 옅게 미소 짓고 각자의 자리로 나섰다. 그 일련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엘린에게 오르슈팡이 시선과 고갯짓으로 그를 이끌었다. 엘린은 잠시 놀란 듯 눈을 끔뻑여 주위를 돌아보고 그의 뒤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매일 오는 침실은 가구 배치 하나 바뀐 곳 없어 익숙하지만, 오늘은 왠지 낯설었다. 아마제 마음이 돌무더기를 쏟아부은 호수처럼 요동치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한 엘린은 다리근육을 일일히 움직여 무겁게 앞으로 걸어갔다. 긴박했던 몇 시간 전과는 너무나 대비되는 정적에 왠지 압도된 것 같았다. 눈물샘도 함께 긴장이 풀렸는지 벌써부터 흐려지는 시야에 속으로 동요했다. 그것을 보이지 않으려 손을 뒤로 숨겨 주먹을 그러쥐었다. 하지만 오르슈팡은 그것을 눈치챈 건지, 그를 향해 뒤돌아 슬쩍 팔을 벌려보았다. 엘린은 눈물을 머금은 눈을 크게 떠서는, 처음 이 방에 들어올 때처럼 잠시 멈추어 섰다. 저곳으로 가고 싶은데, 발이 마음 가는 대로 떨어지지 않았었다. 자신이 정말로 이런 과분한 대우를 받아도 되나 싶은 생각마저도 들었다. 미처 떼지 못한 흙먼지가 그의 갑옷을 더럽히면 어쩌나 싶기도 해 주저했다. 하지만 오르슈팡은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그를 기다렸다. 이윽고 엘린이 발을 뗐을 때는 눈동자에서 넘쳐흐른 눈물이 한줄기 볼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었다. 표정이 구겨지는 것을 보이고 싶지 않아 입꼬리를 내리고 고개를 숙인 것이 최대한의 노력이었다.

 

   엘린은 오르슈팡의 허리를 꽉 끌어안고 그것이 지푸라기라도 되는 양 흐느끼기 시작했다. ‘마음껏 울어도 된다는 허락받은 어린 아이처럼 서럽게, 하지만 제 나이대가 겪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깊고 어두운 울분을 가슴에 품은 채 고개를 젓고 사시나무처럼 어깨를 떨었다.

 

   마지막으로 누군가에게 안겨본 적은 언제인지, 누군가의 품에서 눈물을 흘려본 적은 있었는지. 무엇 하나 떠올리지 못했지만, 다 자라기 전의 자신에게도 그런 날이 분명히 있었음은 어렴풋이 짐작하였다. 온기를 머금을 수 없는 사슬과 가죽 갑옷으로 덮인 그의 품속에서 느껴지는 마음의 온정은 제 머나먼 옛 추억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기억이 아니라 그저 느낌일 뿐이지만지금의 엘린은 만족했다.

 

   “편히 쉬어도 된다고 말했잖는가. 이곳에서는 네가 심신의 긴장을 풀 수 있으면 기쁘겠어. 이 방은 이제둘의 공간이기도 하니까.”

 

   그는 적당한 강도로 엘린의 어깨와 등을 두드려 눈물을 최대한 흘려보내는 걸 도왔다. 그렇게 하여 엘린의 속내에 있는 부정적인 감각도 함께 씻겨 해소되기를 바랐다. 때문에 일부러 더 밝게 손님들을 맞이해준 것도 있다. 반가운 마음은 진실이었으니까. 하나만 더 말해보자면, 벗이 안심하고 위로받을 수 있는 모습으로 있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리고 고백해보자면, 언제든 찾아와 고민을 들어줄 수 있는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고 싶은 욕심도 분명 있으리라. 오르슈팡은 장갑을 벗고 엘린의 얼굴을 푹 적시는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주며 그런 생각을 했더라.

 

 

   ⋯남자는 지금 상황에서 우습게도 자신이 품게 된 감정이 이라 운운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넘어서 있단 사실을 알아채 버렸다. 묘하게 동그랗고 보드라운 양 볼, 맨손을 대는 자신을 바라보는 눈물 젖은 속눈썹 너머의 이글거리는 눈, 지쳐서 물 한 잔을 비우고 간신히 취침 준비를 마쳐선 곧장 잠든 얼굴. 그가 매일 봐왔던 것이다. 오르슈팡은 이 소녀를 지켜주고 싶다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엘린이 자신을 가벼이 뛰어넘는 전투 실력을 갖췄고, 셔츠를 껴입어도 드러나는 근육과 열정에서 빛의 전사라는 칭호가 괜히 붙은 게 아니란 것쯤은 알고 있다. (그가 엘린을 마음에 두게 된 계기가 바로 그것이었으니.) 그리고 이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기엔 이 세상이 아직 엘린을 필요로 한다는 것도, 슬프게도 아주 잘 알고 있다.

 

   ‘그의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이 먼저야.’

 

   오르슈팡은 찬찬히 시선을 옮겨 창문 너머를 보았다. 오늘은 드물게도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달이 두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은은하지만 꺼지지 않는 연분홍빛 등불이 은빛 검날(희망)을 붙잡고 곤히 잠든, 고요한 밤이었다.